세줄 요약:
- 미리 스포를 당하고, 세부적인 촬영 비하인드 같은 것을 미리 찾아보고 나서 작은 핸드폰 화면으로 보면 공포영화도 조금 덜 무서운 것 같다 (가설).
- 장군의 우선순위가 분명한 것 같아서 보면서 마음이 놓였다.
-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기한 무급 노동.
영화 <파묘>를 봤다. 워낙 오랜만에 흥행했던 영화라 줄거리는 대충 알고 있었고, 어떤 내용인지도 알고 있었고, 사실 궁금하기는 했는데 공포영화 시청의 후유증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접어두고 있던 차였다. 그러다가 어쩌다가 알고리즘에 파묘에 숨겨져 있던 상징들(?) 이런 블로그 포스트를 보고 호기심도 동하기도 했고, 뭔가 자발적 스포일러를 당해 보니 무서운 마음도 조금 사라져서 결국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봤다. 사실 그마저도 무서워서 TV나 빔프로젝터로는 못보고 핸드폰 작은 화면으로 봤다. 핸드폰 화면 너머에 있는 소파 위에 아직 개지 않은 수건더미라던가, 드라이를 맡겨야 하는 옷 무더기 등으로 언제든 눈을 돌릴 수 있게.
감상은 나쁘지 않았다. <검은사제들>까지만 하더라도 영화관에서 서라운드 효과를 톡톡히 누리면서 봤어서 그런지 보면서 되게 무서웠고, 보고 나서 한동안 계속 무서웠는데, 걱정했던 것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조금 긴장했던 김고은의 굿 장면은 되게 절제된 연출로 불필요하게 자극적인 것 없이 표현된 것 같았고, 잊을 만하면 기독교적인 대사나 설정들이 다시 나와서 오컬트적인 부분을 중화시켜주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전반적인 느낌이 오컬트보다는 좀 더 민족주의 영화 같은 느낌을 줘서 그것도 신기했다.
그리고 하나 더 좋았던 건 항상 공포영화 보면서 생각하는 건데, 만약 귀신이랑 주인공이랑 막 싸우는데 그 장소가 주변에 사람이 있을 만한 환경이라고 하면, 나는 항상 저러다가 귀신이 수틀려서 옆집에 있는 사람 인질로 잡고 우위를 점하려고 하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을 한다. 마치 <제임스 본드> 영화의 추격씬에서 제임스 본드가 노점상 같은 걸 파괴하면서 달리면 슬퍼할 그 노점상 주인에게 이입하게 되는 것처럼, 내가 귀신의 인질이 되는 그 옆집 사는 엑스트라가 될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근데 이 영화에서는 귀신 역인 장군이 계속 자기가 돌아가야 하는 곳의 위도를 반복적으로 외워줘서 조금 마음이 놓였다. 아, 쟤는 우선순위가 분명하구나, 뭘 하더라도 일단 자기 집으로 먼저 돌아가서 생각하겠다는 거구나, 하는 느낌이라, 얘가 강원도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시 송파구에 살고 있는 나한테 굳이 관심을 갖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안심이 되었다.
영화라는 건 알고 있지만, 어쨌든 스크린/화면/브라운관이라는 얇은 벽을 하나 두고 쟤랑 나랑 소통하는 것이지 않는가. 뭐, 일방적 소통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소통은 소통이니까 내가 쟤를 컨텐츠로서 구경할 수 있는 것일 테다. 근데 만약 이게 일방적 소통이 아니면? 사실 쟤 나 다 보이는데 일단 모르는 척하고 있는 거면? 이런 생각이 든다. 전쟁 영화를 보면서 총알이 나한테까지 날아오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은 안 하지만, 귀신이 나오는 공포영화에서는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아마 전쟁영화 같은 경우에는 기술이 아직 그만큼 발달하지 않았으니까, 하고 넘겨버리지만 귀신은 과학 기술하고는 또 다른 맥락의 제약을 받는다고 생각을 해서 무서운 것 같다. 그래서 영화가 다 끝나고 주인공이 퇴근하고 나면, 그제서야 나한테 와서, 야, 너 아까 나 쥐어터질 때 좋아하더라? 이럴까봐 걱정되는 것이다.
근데 파묘의 그 장군은 그래도 그럴 것 같은 느낌이 아니어서 마음이 조금 편했다. 그리고 김고은한테도 그렇고, 최민식한테도 그렇고 계속 부하 얘기를 하는 게,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그래도 구슬려서 부하를 모으고 싶은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캐러비안의 해적>에 나오는 데이비 존스 생각도 났다. 죽을래, 아니면 내 배에서 무기한계약으로 무급노동할래? 사실 <캐러비안의 해적>이 개봉했을 당시에는 학생이어서 왜 저기에서 죽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 있겠어? 하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이게 그냥 레토릭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사회인이 된 지금 생각해보니 영화에서 죽겠다고 한 성직자의 선택이 완전 이해불가하지는 않다.
다시 <파묘>로 돌아와서, 그 불쌍한 스님이 나오는 장면은 조금 무서웠다. 분명 주인공 일행은 화 당하지 말라고, 좋은 마음으로 봉길의 꿈에 나온 것이라는 점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조금 무서웠다. 잠을 깨워야하는 것은 이해되고, 방금 크게 놀랄 만한 일을 당하셔서 쇼크 상태이신 것도 이해되지만, 그래도… 조금 좋게 깨워주실 수도 있지 않나. 봉길이도 놀라고 시청자도 놀라잖아. 맨 처음에는 스님이 죽은 지 모르고 몽유병(?) 아니면 빙의(?) 같은 건지 알고 봉길이 배를 밟고 서 계실 때 쟤 저거 갈비뼈 괜찮나? 하고 생각했다고. 나도 밤에 잘 때 모로 누워서 자는 편인데 그 날 밤에는 옆으로 기대서 잤다.
아, 그리고 스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 절에 살던 강아지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려주면 좋겠다. 장군하고 주인공 일행이 야외에서 대치할 때에도 강아지가 얼핏 나왔는데 그 때도 장군이 따로 신경 안 쓰는 것 같은 분위기여서 사실 큰 문제 없지 않을까 싶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제 스님도 안 계시면 돌봐줄 사람도 없는 걸텐데… 그래도 근처에 다른 집들도 있었을테니까 그 중 하나가 거둬주었겠지, 하고 생각하기로 한다.
그 외에 감상은 조금 뻔하다. 친일파 후손들이 미국에서 떵떵거리고 살고 있다가 몰살 당하는 걸 보면서는 그냥 당연한 전개라고 생각했고, 친일 할아버지가 찾아가는 순서가 자식-손자-증손 이렇게 세대 별로 가지 않고, 딸을 찾아가기보다는 아들 일가를 먼저 족치시는 걸 보면서 아, 상속이 균등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나보다, 정도의 생각을 했다. 근데 이것도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닌 게, 작위도 있는 집안이었다고 했고, 영화에서 대놓고 “장손”이라는 표현도 썼고, 사실 지금도 딸한테 재산을 균등하게 상속해주지 않는 집이 많으니까. 친일 할아버지가 손자 지용한테 들어갔을 때 경례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게 원래 그 창밖 지용이 바라보던 위치가 조선총독부 자리였다고 한다. 새삼 그 건물 부순 게 참 잘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할아버지랑 호텔방하니까 생각난 거 하나 더. 친일 할아버지는 전화로 지용을 교란해서 창문을 열게 하고 그렇게 호텔방에 침투하는데, 잠깐 화면에 잡힌 지용의 핸드폰은 유효한 통화 화면이었다. 그럼 할아버지가 다른 사람의 핸드폰을 빌려서 지용한테 전화를 건 건가? 아니면 공중전화로? 그게 아니면 그냥 다른 사람이 전화를 했고 거기에 할아버지가 자기 목소리만 입힌 건가? 그리고 창문을 열어서 들어온 거면 할아버지는 방충망 통과 가능하신 건가? 공기나 미세먼지처럼 출입하실 수 있는 거면 조금 곤란하지 않나. 내가 한겨울에 보일러 빠방하게 틀어놓고 찬 공기로 환기하는 환기변태여서 만약 귀신이 방충망을 통과할 수 있는 거라면 매우 곤란하다. 창문마다 명태를 걸어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 물론 집안 내의 부의 수준을 보았을 때, 집안에 유의미하게 친일을 하신 조상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부러 맞바람이 가능한 집을 찾아서 온 건데… 하지만 환기를 포기할 수는 없으니 그냥 내가 나쁜 짓 안 하고 깨끗하게 살기로 한다.
어쨌든 <파묘> 재밌었다. 막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장면도 없고, 하고자 하는 메세지도 분명하고. 악역인 귀신도 비열한 캐릭터인 것 같지는 않아서 좋았다. 외국인 노동자를 왜 적장이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에는 군인이 민간인을 죽이면 안 된다는 전통이 없나? (이 부분 궁금해서 나중에 찾아보니까 민간인을 죽이면 안 된다, 이런 맥락의 전통들이 성문화된 건 주로 헤이그협약(1907)이랑 제네바협약(1949) 때라고 한다. 왜란 당시에 살던 사람이니 아마 익숙하지 않은가 보다. 아, 근데 다시 생각해보니 멀리 갈 것도 없이 얘네 왜란 때 민간인 엄청 죽였지;;) 어쨌든 스님하고 외국인노동자, 그리고 억울하게 살인자로 몰린 곰을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얼레벌레 해피엔딩이지 않았나 싶다. 하루 정도 옆으로 누워서 자느라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위에 눌리거나 하는 후유증도 없었고… 나름 선방한 것 같다.
